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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라는우주/인문학과 문학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by 굿에디터 2023.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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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작가님의 단편소설을 매우 좋아해서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가 출간 되자마자 바로 읽었다. 

역시 쇼코의미소 만큼 정말 좋은 단편들이었다. 

 

첫번째.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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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유연화 정책이.....문제라고 말했습니다."
"아니. 그전에 뭐라고 했죠?"
그는 당황하여 귀가 붉어진 채로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앞서 얘기한 학생의 의견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죠. 그것도 말을 끊어가면서."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 웃음기가 걷힌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내 수업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지금 이 자리 에서 앞의 학생에게 사과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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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수치스 러웠다. 내가 그 글을 쓰면서 남들에게 어떻게 읽힐지 의식했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 표현하고 싶은 생각이나 느낌을 그대로 담았을 때 감상적이라고, 편향된 관 점을 지녔다고 비판받을까봐 두려워서 나는 안전한 글쓰기를 택 했다. 더 용감해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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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녀의 이름으로 나온 글이나 번역서를 찾 을 수 없었다. 구 년 전의 내 눈에는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강해 보 였던 그녀가 어디에도 자리잡지 못하고, 글이나 공부와 무관한 사 람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때로는 나를 얼어붙게 한다. 

나는 나아 갈 수 있을까. 사라지지않을 수 있을까. 머물렀던 흔적조차 남기 지 않고 떠난, 떠나게 된 숱한 사람들처럼 나 또한 그렇게 사라질까. 이 질문에 나는 온전한 긍정도, 온전한 부정도 할 수 없다. 나는 불안하지 않았던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두번째.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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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의 목소리가 조금 달라졌다고 당신은 생각했다. 정윤은 망설이며 모르겠어.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맑은 물 같았다. 목소리 자체도 그랬지만 그보다는 목소리에 담긴 결기가 차갑고 시원하게 느껴졌다. 자신에 가득찬 자기 자신을 온전히 믿는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라고 그때의 당신은 생각했다. 정윤이 조리 있게 자신의 생각을 말로 풀어내는 모습을 볼 때. 당신은 매혹되었으나 동시에 옅은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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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영이 글의 마지막 문장을 읽었을 때, 편집실은 고요했다. 낭독이 끝났는데도 편집실을 채운 팽팽한 분위기가 호트러지지 않았다. 아마 다른 사람 모두 알고 있었으리라고 지금의 당신은 생각한다. 희영에게는 타고난 관찰력과 자기 생각을 끝까지 끌어가 는 용기.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지력이 있었다.
희영이 가진 장점들의 상당수는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몇 가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타인의 상처에 대해 깊이 공감했고, 상처의 조건에 대한 직관을 지니고 있었다. 글쓰기에서는 빛날 수 있으나 삶에서는 쓸모없고 도리어 해가 되는 재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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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일이 쉬웠다면, 타고난 재주가 있어 공들이지 않고도 잘 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당신은 쉽게 흥미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렵고, 괴롭고, 지치고, 부끄러워 때때로 스스로에 대한 모멸 감밖에 느낄 수 없는 일,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것 또한 글 쓰기라는 사실에 당신은 마음을 빼앗겼다. 글쓰기로 자기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다시 글을 써 그 한계를 조금이나마 넘을 수 있다는 행복, 당신은 그것을 알기 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새번째. 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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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해요.
괜찮으니 마음놓아요. 전 좋아요. 이렇게 얘기하는 거.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자기 마음을 의심했다. 괜찮다고 했지만 정말 괜찮은지, 좋다고 말했지만 좋기만 한지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경계를 허물어준 다희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숨김없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다희의 마음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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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요. 앞으론 그냥 갈게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웃으며 사무실을 나왔지만 씁쓸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희에게 서운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서운하다는 감정에는 폭력적인 데가 있었으니까. 넌 내 뜻대로 반응해야 해, 라는 마음. 서운함은 원망보다는 옅고 미움보다는 직접적이지 않지만, 그런 감정들과 아주 가까이 붙어 있 었다. 그녀는 다희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싶지 않았다.

 

네번째. 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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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더는 나를 믿지 않네."
언니는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지. 그래, 나는 너를 믿지 않아. 언니는 온몸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어. 내 안에서는 그런 언니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 나와 언니를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또다른 내가 싸우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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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두 눈을 천천히 깜빡이다가 책상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였어.

언니의 키와 얼굴, 목이 올긋불긋해지는 걸 나는 가만히 지켜봤어.

언니가 느낄 수치심을 어림하면서 뒤틀린 만족감을 느꼈지. 나는 언니의 무너진 마음 위에 올라서서 입을 열었어.

 

다섯번째. 파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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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가는 길이 힘겨워도 의미가 있으며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생각하던 그가 삶을 원했다. 삶의 어떤 것에도 특별히 욕심을 내지 않았던 그가 더 살고 싶어했다.

여섯번째. 이모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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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찻집으로 이동해서 데면데면하게 앉아 있었다. 망설이다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묻자 이모는 자기 집에 사는 하숙생 들을 얘기하며 칭찬했다. 그리고 얼마 안돼 동네 사람들이 무식하다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슈퍼 앞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술이나 마시고, 기본 상식을 모르는 걸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나는 별다른 대답 없이 이모의 말을 들으면서 익숙한 거부감을 느꼈다. 그런 이모는 얼마나 유식하고 얼마나 잘났는데? 그러고는 이모에게 그런 마음을 품었다는 사실에 곧바로 죄책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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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성인이 된 이후로 느꼈던 내 마음을 천천히 인정했다. 내가 거듭해서 이모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결국 비슷한 주름을 얼굴에 새기면서 싫어하는 것들의 목룩만 늘려가는 인간이 될까봐, 자기 상처에 매몰되어 다른 사람의 상처는 무시하고 별것도 아니라고 얕잡아 보는 편협하고 어두운 인간이 될까봐 겁이 났다는 사실을. 하지만 나는 이미 그런 사람이 되 어가고 있었다. 이마에 떨어진 차가운 눈송이가 곧 물방울이 되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일곱번째.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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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고 성숙해진다는 건 그저 자신의 환경에 점점 더 익숙 해진다는 뜻인지도 몰랐다. 기남은 낯선 그곳에 앉은 채 자신이 여전히 미숙하고 여전히 두려움이 많은 아이라는 걸 깨달았다. 기남은 아홉 살 아이의 마음이 되었다. 아홉 살 아이처럼 두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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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대답하고 기남은 불현듯 이해할 수 있었다. 부끄러움.
마이클의 말이 맞았다. 기남은 부끄러웠다. 우경의 눈에 비칠 자 신의 모습이, 그애가 오래전 자신을 멀리 떠난 일이, 진경의 알코올 중독이, 두 아이가 결국 화해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른 사실이... 기남은 부끄러웠다. 남편에게 단 한 번도 맞서지 못하고 살았던 시간이, 그런 모습을 아이들이 보고 자란 것이...... 기남 은 부끄러웠다. 부모에게 단 한순간도 사랑받지 못했던 자신의 존재가, 하지만 그 사랑을 끝내 희망했던 마음이..... 기남은 이 모든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다. 부끄러워서. 기남은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해설. 더 가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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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의 소설은 으레 수동적이라고 여겨졌던 행위들이 가진 역동성을 드러내는 데 능하다. 

그뿐 아니라 강한 성향이 품고 있는 연한 속성을, 기쁨이 숨기고 있는 깊은 슬픔을, 평화로운 풍경 속에 도사리고 있는 폭력을, 혼자에 가려진 여럿을 드러냄으로써 그간 정반대의 것이라고 알려진 것들이 실은 얼마나 닮아 있는지, 이들이 서로를 지탱하면서 세상을 얼마나 촘촘하게 구축해왔는지 차분히 밝혀오기도 했다. 소설에서 '읽는 일'이 다뤄질 때도 마찬 가지다. 책에 마냥 순응하는 모습으로 알려져 있는 '독자'는 최은영의 소설에서는 행간에 " 보이지 않는 잉크"<토니 모리슨, 보이지 않는 잉크」, 이다희 옮김, 바다출판사, 2021, 19쪽)로 쓰여 있는 - 공백'에 숨겨져 있는 이야기를 꺼내고, 그 이야기와 나란히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능동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마치 소란으로 가득찬 침묵을 품고 소설을 읽고 있는 지금의 우리 모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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