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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라는우주/인문학과 문학

폴란드 여류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노벨문학상 수상자)

by 굿에디터 2020.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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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1923년 폴란드 중서부의 작은 마을 쿠르니크에서 태어난 여류시인이다.

1945년 『폴란드일보』에 시 「단어를 찾아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으며, 노벨 문학상을 비롯한 굵직한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녀의 시집으로는 「충분하다」와「끝과 시작」이 있는데 두 권 모두 추천한다. 

 

끝과 시작
국내도서
저자 : 비슬라바 쉼보르스카 / 최성은역
출판 : 문학과지성사 2007.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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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던지는 질문

미소 짓고 손을 건네는 행위,

그 본질은 무엇일까?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순간에도

홀로 고립되었다고 느낀 적은 없는지?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듯.

첫 번째 심문에서 피고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는

엄정한 법정에 끌려 나온 듯.

과연 내가 타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책을 펼쳤을 때 활자나 삽화가 아닌

그 내용에 진정 공감하듯이.

과연 내가 사람들의 진심을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럴듯하게 얼버무리면서

정작 답변은 회피하고,

손해라도 입을까 겁에 질려

솔직한 고백 대신 번지르르 농담이나 늘어놓는 주제에.

참다운 우정이 존재하지 않는

냉혹한 세상을 탓하기만 할 뿐.

우정도 사랑처럼

함께 만들어야 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혹독한 역경 속에서

발맞춰 걷기를 단념한 이들도 있으련만

벗이 저지른 과오 중에

나로 인한 잘못은 없는 걸까?

함께 탄식하고, 충고를 해주는 이들도 있으련만.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도 전에

얼마나 많은 눈물이 메말라버렸을까?

천년만년 번영을 기약하며

공공의 의무를 강조하는 동안,

단 일 분이면 충분할 순간의 눈물을

지나쳐버리진 않았는지?

다른 이의 소중한 노력을 

하찮게 여긴 적은 없었는지?

탁자 위에 놓인 유리컵 따위엔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법,

누군가의 부주의로 인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기 전까지는.

 

사람에게 품고 있는 사람의 마음,

과연 생각처럼 단순하고 명확한 것이려나?

 

 

두 번은 없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단어를 찾아서

솟구치는 말들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었다.

있는 그대로의 생생함으로

사전에서 훔쳐 일상적인 단어를 골랐다.

열심히 고민하고 따져보고 헤아려보지만

그 어느 것도 적절치 못하다.

 

가장 용감한 단어는 여전히 비겁하고

가장 천박한 단어는 너무나 거룩하다.

가장 잔인한 단어는 지극히 자비롭고

가장 적대적인 단어는 퍽이나 온건하다.

 

그 단어는 화산 같아야 한다.

격렬하게 솟구쳐 힘찰게 분출되어야 한다.

무서운 신이 분노처럼,

피 끓는 증오처럼

 

나는 바란다. 그것이 하나의 단어로 표현되기를

피로 흥건하게 물든 고문실 벽처럼

내 안에 무덤들이 똬리를 틀지언정

나는 정확하게, 분명하게 기술하고 싶다.

그들이 누구였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 내가 듣고 쓰는 것, 그것으로 충분치 않다.

터무니없이 미약하다.

 

우리가 내뱉는 말에는 힘이 없다.

그 어떤 소리도 하찮은 신음에 불고하다.

온 힘을 다해 찾는다.

적절한 단어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찾을 수가 없다.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내가 잠든 사이에

뭔가를 찾아 헤매는 꿈을 꾸었다.

어딘가에 숨겨 놓았거나 잃어버린 뭔가를,

침대 밑에서, 계단 아래에서

오래된 주소에

 

무의한 것들, 터무니없는 것들로 가득 찬

장롱 속을, 상자 속을, 서랍 속을 샅샅이 뒤졌다.

 

여행 가방 속에서 끄집어냈다.

내가 선택했던 시간들과 여행들은

 

주머니를 털어 비워냈다.

시들어 말라버린 편지들과 내게 발송된 것이 아닌 나뭇잎들

 

숨을 헐떡이며 뛰어다녔다,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들,

불안과 안도 사이를.

 

눈의 터널 속에서

망각 속에서 가라앉아버렸다.

 

가시덤불 속에서

추측 속에서 갇혀버렸다.

 

공기 속에서,

어린 시절의 잔디밭에서 허우적거렸다.

 

어떻게든 끝장을 내보려고 몸부림쳤다.

구시대의 땅거미가 내려앉기 전에,

막이 내리기 전에, 정적이 찾아오기 전에

 

결국 알아내길 포기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나는 과연 무얼 찾고 있었는지

 

깨어났다,

시계를 본다

꿈을 꾼 시간은 불과 두 시간 삼십 분 남짓

 

이것은 시간에게 강요된 일종의 속임수다

졸음에 짓눌린 머리들이

시간 앞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부터

 

 

끝과 시작비슬라바 쉼보르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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