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몬드'라는 손원평 작가님의 소설을 푹 빠져 읽었었기에, 서점에서 신간 '튜브'를 발견한 순간 바로 사야겠다고 결심했다.
중후반부터 몰아치는 감정선에 '역시 작가님이시구나' 하는생각으로 끝까지 재미있게 읽게된 책이다.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을 쓰게된 계기가, 포털 질문란에 '실패한 사람이 다시 성공하는 이야기를 추천해달라는, 지금 자신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너무나 필요하다'는 글이 간절해보였는데 아무런 댓글이 달리지 않아 그 사람을 위한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이라고.
안주하지 않고 힘들 다하는 영혼들에게 멀리서나마 박수를 쳐주고 싶다고 해주셨는데, 소설 끝에 그 글을 읽으니 뭉클해졌다.
개인적으로 나이를 먹을수록
인생을 실패와 성공의 잣대로 나누는게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전보다 더 정직하게, 겸손하게, 현명하게, 또한 주변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전할 수 있게 발전하고 있는가에 더 관심이 간다.
그래서 이 소설의 후반부에서 깊은 울림과 감동을 받지 않았나 싶다.
다시 기억하고 싶은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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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오랫동안 인생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어, 안드레아.
은향이 말했다. 오랜만에 듣는 안드레아라는 이름이 성 곤의 마음에 정체 모를 희미한 물결을 일으켰다.
- 모든 게 전부 운명인지, 아니면 내가 했던 행동과 생각의 결과인지 말이야. 그러다가 문득 삶은 그냥 받아 들여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게 됐어. 편하더라. 내 의지 같 은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니까 내가 힘쓸 이유도 없 어진 거야. 그런데 말야, 몸집은 이렇게 커졌지만 늘어딘 가가비어 있다고 느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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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그대로 바라보고 조금 더 나은 상태, 기준의 상태에서 벗어난 단계로 이동하는 변화,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변화의 시도와 기록 그 자체였다.
성공의 반대말은 실패지만, 변화의 반대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스스로가 만든 지푸라기를 잡고 떠오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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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당신 눈빛이 너무 뜨겁지 않아서 다행이야.
전엔 활화산 같아서 불안했는데 지금은 촛불 같아서 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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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넌 절대로 원하는 만큼 한번에 이룰 수는 없어.
세상이 그렇게 관대하고 호락호락하지가 않으니까.
근데 말이지, 바로 그만두는 건 안 돼. 일단 안 돼도 뭔가가 끝날 때까지는 해야 돼.
- 언제까지요?
- 끝까지.
- 끝이 언젠데요.
-알게 돼.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상황이 끝나든 네 마음이 끝나든, 둘 중 하나가 닥치게 돼 있으니까.
-그다음엔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다시 시작해야지. 네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부 터 다시.
-뭘요?
-되는 것부터. 너 스스로 할 수 있는 것 중 되는 것부 터. 운동이든 공부든, 책을 읽는 거든. 하다못해 나처럼 등 을 펴는 게 됐든.
너 혼자 정해서 너 스스로 이뤄낼 수 있 는 것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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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알아?
정말 어려운 전 힘든 상황에서도 어떤 태도를 지켜내는 거야.
난 당신이 그걸 해낸 줄 알고 응원 했어.
진심으로 노력해서 결국 바뀌었다고 생각했지.
근데 당신은 허형에 빠져 자만한 거였고 나도 내가 믿고 싶 은 대로 착각한 것뿐이었어.
잠깐은 모든 게 잘돼간다고 생각했겠지.
상황 좋고 기분 좋을 때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쉬워.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라고.
그런데 바쁘고 여유 없고 잘 안 풀리니까, 당신은 바로 예전의 당신으로 되돌 아갔지.
그러니까 당신은 전혀 변하지 않은 거야. 넌 끝까 지 그냥 원래의 너 자신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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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내 보기엔 당신도 꽤 잘 살아온 걸로 보여요.
- 제가 뭘 잘 살아요. 전 엉망인걸요.
김성곤은 코를 훌쩍이며 투정을 부렸다.
-물론 엉망이지. 엉망이니까 지금 생판 모르는 나한 테 와서 울고 있는 거 아니겠어요?
박실영이 허허 웃었다.
-근데 정말 엉망이기만 합니까?
- 예?
- 정말로 엉망이기만 하냐고.
박실영이 성곤에게 얼굴을 쓱 들이밀었다.
-잘 살펴봐요, 지나온 삶을. 엉망이기만 한 삶은 있 을 수가 없어요. 그런 건 애초에 불가능해.
박실영은 다시 몸을 뒤로 젖히고 성곤을 지그시 바라봤다.
- 그리고 내 보기에 당신은 잘 살아온 것 같아요. 계 속 삶에 대해 알아내려고 애쓰는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잘했어요. 아주, 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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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언젠가 남자는 당신과 부딪힌 적이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당신은 그 사실 역시 전혀 떠올리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등이 곧았음은, 그의 눈이 맑게 빛나고 있 었음은,
그 숱한 일들을 겪고 때로 바닥을 보인 후에도 어 느새 그의 얼굴 위로 모든 것을 안아내는 지혜로운 영혼 이 새겨지고 있었음은,
그러니까 그가 이 이야기의 처음과는 꽤 다른 얼굴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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