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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라는우주/인문학과 문학

1984 [조지오웰]

by 굿에디터 2015.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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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l  조지오웰


진짜 역사는 지워지고 새로운 거짓 역사가 씌여진다는 것은 꽤나 충격적이고 무서웠다. 내가 지금 알고있는 역사가 100%진실이 아닐것이라는것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거짓역사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흔히 언론플레이라고 하는 것들이 그렇다면?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난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그 진실이 내가 살아있는 동안 드러나지 않는 일종의 역사같은 것이라면, 꽤나 힘빠지는 일이다. 하지만 정말 힘빠지는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다. 이 소설의 노동자들처럼 나는 대부분을 죽기 직전까지도 진실이라고 알고 죽을테니까.다수의 목소리가 주장하는 진실은 실상 거짓 사실일수도 있고, 오히려 소수가 외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려던 울부짖음이 진실일 수 있다. 


현 시대에서도 1984를 통한 조지오웰의 경고는 작용할 수 있다는 옮긴이의 말이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1984]는 오늘을 사는 우리와 무관한 소설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오늘날의 우리는 항상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  윈스턴이 하루 스물네 시간 텔레스크린의 감시를 받으며 생활했듯이 말이다. ....잠시 주위를 한번 돌아보자. 은행, 백화점, 관공서 등 어디나 할 것 없이 몰래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하여 누군가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컨대 우리가 언제 얼마의 현금을 인출하는지, 어떤 물건을 사는지, 무슨 복장을 하고 공문서를 발급받는지를 감시하고 있다. 그 같은 감시는 도로에서도 행해진다. 도로 곳곳에 설치된 유선 카메라는 우리의 사소한 교통 법규 위반까지 체크한다. 우리는 그런 카메라 앞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심지어 지구를 도는 인공위성의 초정밀 카메라로는 우리가 안방에서 무엇을 하는지조차 찍을 수 있다.  .... 

1984년은 이미 끝났다. 하지만 [1984]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1984]는 결코 이십 년 전의 과거나 먼 미래의 상황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정보화 시대라고 일컫는 오늘날의 상황이다. [1984] 안에서 일어난 일들은 우리의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겁먹을 필요는 없다. 우리 인간에게는 자유를 지키려는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자유를 지키려는 의지 앞에서는 그 어떤 정치적 권력도 끝내는 좌절하고 만다. 자유를 향한 의지를 품고 있는 한 전체주의보다 더 강력한 정치 시스템도 인간을 지배할 수 없다. 우리가 [1984]를 토해 얻은 교훈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일 것이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인간은 때에 따라서 의식적으로 증오의 대상을 바꿀 수 있다.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자신의 신경조직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마음속의 긴장은 언제 어느 때든 눈에 띄는 증세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앞으로도 경험의 타당성뿐만 아니라 외적 현실의 존재마저 그들의 철학에 의해 교묘하게 부인될 것이다.

진정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그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실들은 그들의 관심 밖이었다. 그들은 큰 것은 못 보고 작은 것만 볼 줄 아는 개미와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점점 기억은 상실되고 기록은 날조되어 가는데도 인민들의 생활이 개선되었다는 당의 주장이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위기의 순간에 싸워야 할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육체라는 사실에 그는 적잖이 당황했다. 

이미 우리는 혁명 당시와 그 이전의 시대에 대해서는 아는 게 하나도 없어. 모든 기록은 폐기되거나 날조되었고, 책이란 책은 모두 다시 씌여졌으며, 모든 그림도 다시 그려졌어. 또 모든 동상과 거리와 건물에는 새 이름이 붙었고, 역사적인 날짜마저 모두 새롭게 고쳐졌지. 물론 이런 작업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행해지고 있어. 한마디로 역사는 정지해 버린 거야. 

오늘날의 세계는 1914년 이전에 비해 헐벗고 굶주리고 황폐화되었다. 당시의 사람들이 예견했던 상상 속의 미래 세계와 비교해 보면 더욱 그렇다. 20세기 초에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예측했던 미래 사회란 풍요하고 여유가 많으며, 질서가 잡힌 가운데 모든 것이 능률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장기적인 전쟁과 혁명으로 인해 나라 살림이 거덜 난 한편, 과학과 기술의 발전적 토대가 될 경험적 사고방식이 엄격한 통제 사회에서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면에서 볼 때 오늘날의 세계는 오십 년 전보다 더 원시적이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늘 전쟁을 했고, 승자는 언제나 패자를 약탈했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지배자들은 서로간의 전쟁은 하지 않는다. 전쟁은 이제 지배 집단이 국민을 상대로 벌이는 싸움이며, 전쟁의 목적도 영토의 정복이나 방어가 아니라 사회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는데 있다. 결국 '전쟁'이란 낱말은 잘못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늘 전쟁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전쟁이 없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이해력이 좋으면 좋을수록 착각을 많이 하고,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정신이 덜 건전하다.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전쟁에 대한 열망이 높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떤 이유로든 심한 고통을 받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바라는 게 있다면 딱 한가지, 빨리 고통을 멈추어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세상에서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고통 앞에서는 영웅도 없다. 절대로 없다. 

얼마 동안인지 알 수는 없지만 오브라이언의 새로운 가르침이 그의 텅 빈 곳을 채워서 절대적인 진리가 되고, 둘 더하기 둘이 필요에 따라서는 셋도, 다섯도 될 수 있음을 확신할 수 있는 순간이 있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대다수의 인간이 얼마나 타락한 삶을 살고 있으며, 윈스턴보다 수천 배나 더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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